Wednesday, September 29, 2010

Survival Note, 2010/09/28 (Yi Dahn)

아 놔.
갤러리 거주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나는 왠만하면 아무데서나 자고 아무거나 먹고 꽤 오랫동안 안씻을 수 있다. 그런 내가 심란한 정도라면, 이건 심각한 상황이라는거다. 갤러리는 1층 복합공간 - 2층 까페로 나뉘는데, 2층 한켠에 생활할 수 있는 작은 방이 있다.

이 방에 내가 머물기로 했는데, 막상 들어가보니 몇년 전에 입은 옷인지 알 수 없는 옷가지들을 비롯, 쓰레기인지 물건들인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두서없이 먼지와 켜켜이 쌓여있는데다가 본드와 스티로폼조각을 비롯한 각종 유해모형재료들로 눈이 따가울 지경이다.

같이 프로젝트를 하는 아키의 집, 오쿠나카가(家)에서 프로젝트 시작전 약 보름간 배부르고 행복하게 신선놀음을 하다 와서 그런지, 더욱 한숨이 나온다. 아마 하나무라씨(공간 대표)가 한국으로 급히 떠나서 미처 치우지 못했나보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처 체크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주 가까운 곳에 목욕탕이 있긴 하지만, 한번 사용료가 무려 500엔(약 6827원)!!! 어쩌다 한 번 푹 몸을 담그러 가는 것이야 괜찮겠지만, 매일 세수나 간단한 샤워 한번 하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살펴보니, 이 건물에서 유일하게 온수가 나오는 곳은 변기의 비데이다. 아주 잠깐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아니아니, 그건 정말 너무 아니다… 나도 인간이란 말이다……

대학시절처럼 물을 끓여 세수를 해야 하나? (이제서야 말인데, 정확히 말하면 한겨울에 정수기 온수를받아서 했다… 공공시설물을 엉뚱한데 써서 좀 죄송하긴 하지만 나도 연이은 야작에 때에 쩔어 좀 절박한 상황이었다;)

여하튼, 오쿠나카 가족들이 바리바리 챙겨준 각종 식재료(심지어 쌀푸대까지)와 간식, 난방기기 등으로 짐이 생각보다 꽤 많아져 일단 모두 밀어넣고 탈출. 1층에서 연극 연습을 여덟시까지 하기 때문에, 자리도 비킬 겸 일단 아키(아키히토 오쿠나카, 이번 프로젝트 파트너 작가)와 근처 페밀리레스토랑으로 직행했다. 오늘 이후로 아키를 볼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마무리짓지 못한 논의를 끝내야만 한다. 프로젝트 세부 사항을 마무리짓고, 복잡한 예산안을 결정하고 나니 아홉시를 훌쩍 넘었다. 게다가 재수없게도 생리통이 시작되었다. 이를 악물고 약을 우겨넣었다.

갤러리로 돌아오니 (사실 갤러리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althernative space라는 말 그대로, 여기는 극장이 되었다가, 세미나룸이 되었다가, 갤러리가 되었다가, 영화 세트가 되는 등,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암튼), 2층 까페에서 극단원들의 뒷풀이가 막 끝나가는 중이다. 단장에게 우리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찌라시 홍보를 부탁했다. 뭔가 씻는 문제에 대한 난감함을 눈치챈듯, FLAT의 스탭들이 어떻게 할거나고 물어본다. 이어 약 1분 거리에 사는 모리시마상이 매일은 아니더라도, 자기집에서 샤워를 하는 것이 어떻냐는 친절한 제안을 했다. 난, 거절을 모르는 여자라 덥썩 받아들였다.

사람들이 돌아간 후, 방을 대충 치우고 (사실 치운다기보다는 대충 한구석에 밀어넣는 수준), 대충 짐을 풀고 나니 내가 도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가, 한숨이 나기도 하고 약이 오르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자그마한 복수로 까페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큰걸로 하나 훔쳐먹었다. 오늘까지 명함을 만들어야 하기에, 일단 하나무라씨의 매킨토시를 사용하는데, OS가 일본어라 초 난감하다.

사실 나를 더 우울하고 난감하게 만드는 것은 이 '기계들의 반란'이다. 일본에 오자마자 메일 서버가 폭발하고, 이후 불안불안하게 가동되던 나의 오랜 노트북이 약 일주일 후 (한국에서 모든 점검을 철저히 끝내고 새 하드까지 장착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사망했다. 설상가상으로, 인터넷전화마저 먹통이다. 이것은 인터넷 회선의 문제인듯한데, 아마 일본에서는 보이스 포트를 쓰지 않기 때문에 막아놓은 것 같다. 사실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연히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 한순간에 막힐때 느끼는 황당함과 막막함, 기분나쁨을 넘은 순간적인 절망은 생각보다 크다. 사실 나도, 내가 이렇게 기계에 의존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사실, 이것은 기계에의 의존이라기보다는 낮선 곳으로 뚝 떨어져 느끼는 불안함에 대한 것이다. 이제까지 많은 여행을 했지만, 그 여행들의 본질은 '일탈'이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기보다는 그 상황을 즐기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나는 대부분 혼자가 아니었고, 설령 혼자였다 하더라도 대부분 영어가 수월하게 통하는 지역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하다고 대범하게 마음을 먹으면서도, 일견 ''를 보호하거나 손쉽게 증명할 아무런 울타리가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감은 생각보다 꽤 커서, 마치 밑바닥이 없는 검은 구멍을 들여다보고있는 듯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나마 하록과 영상통화를 하고 나니 어느정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알고 있는 각종 단축기와 명령어의 위치와 각종 실험(?)을 총동원하여 밤새 명함을 만들고 나니 아침 10시다. 언제 빨았는지 모를만큼 냄새와 먼지와 머리카락이 가득한 이불을 대충 털어서 둘둘말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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